연계의 (불)가능성_동시대 미술의 단면들

 

김홍기  

미술평론가, 미학연구자  

    

  20세기 후반기는 아마도 온갖 종류의 종말론에 시달린 시기로 기억될 것이다. 예술계에서는 회화의 종말, 모더니즘의 종말, 더 나아가 예술의 종말이 거론되었고, 정치경제 분야에서는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로 역사의 종말까지 회자되었던 것이다. 1999년 말 불어닥친 밀레니엄 버그 소동은 이 모든 사망선고로 인해 증폭된 불안이 응집되어 나타났던 민망한 해프닝이었다. 시간은 인간의 호들갑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페이스를 유지하며 흘러갔고 우리는 어느새 21세기의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내고 있다. 알다시피 거의 모든 것이 종말론의 저주에 희생되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예술가들이 회화와 조각부터 뉴미디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택해 다양한 양식을 구사하며 활동하고 있고,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에도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는 유예되고 갈등과 반목의 역사는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우후죽순 생겨났던 종말론들은 그저 세기말이면 한차례씩 휩쓸고 지나가는 주기적인 열병으로만 여겨야 할 것인가? 미술계와 관련하여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리오타르의 말처럼 거대서사가 종말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이나 또는 그 외의 다른 어떤 담론도 그 자체로 유효성을 상실하진 않았지만, 이제는 그중 어느 것도 거대서사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다. 예술을 판단하고 평가하기 위한 지배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 실각한 것이다. 위계와 기준을 세우는 거대서사가 신용을 잃자 그 자리엔 숱한 담론과 실천이 각각 작은 서사로서 평등한 권리를 갖기 시작한다. 리오타르는 이런 현상을 일컬어 “포스트모던한 상황”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미술을 총체화하고 정돈할 아무런 규정도 없는 이런 포스트모던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이란 그저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이라는 다소 중립적인 명칭에 합의하는 것뿐이다.

  한편으로, 이런 상황은 꽤나 환영할 만한 것이다. 귀족과 시민의 구분을 철폐하고 모든 개인이 사회구성원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 사회의 민주주의의 실현인 것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미술이 중심이나 위계 없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고급미술과 저급미술의 구분을 철폐하는 ‘미술의 민주주의’의 실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미술이라는 특수한 활동과 그 외의 다른 활동들 사이의 위계나 구별마저도 사라진다면, 이것은 다다이스트를 비롯한 역사적 아방가르드들이 꿈꿨던 ‘미술과 일상생활의 일치’에 도달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포스트모던한 상황은 꽤 우려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사회에 관련되든 미술에 관련되든 상관없이 그것이 어떤 ‘공동체’의 이념일 때 의미가 있다. 공동체에 대한 지향이 부재할 때 민주주의는 쉽사리 무정부주의로 변질되어 버린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려스러운 까닭은 이것이 민주주의보다는 오히려 무정부주의적인 상황으로 이끌리기 쉬워 보인다는 데 있다. 극단적인 상대주의와 동일시되는 순간 포스트모더니즘은 당대의 모든 미술의 실천들을 원자화, 파편화시키고 만다. 각각의 예술가들 또는 각각의 예술작품들을 서로 왕래할 수 없는 고립된 섬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또한 비평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상대주의는 고립의 상황을 초래하고 담론들 간의 접속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이처럼 비평의 공통 지반이 상실되면 개별 비평가의 언어는 번역되지 않는 방언이 되어 버리고 비평의 기준은 평론가 개인의 미적 취향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한없는 관대함에 쉽게 피로감을 느끼고 재차 그 ‘이후’를 모색하려 한다면, 그 까닭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이런 위험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동시대 미술의 원자화와 파편화에 저항할 어떤 대안에 대한 욕구가 자꾸만 우리에게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관건은 고립되고 파편화된 것처럼 보이는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실천들 사이의 연계를 모색해 보는 일이다. 이것은 물론 지난 세기의 모더니즘이 누렸던 것과 같은 또 다른 거대서사의 도래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중심과 위계를 재창안하지 않는 수평적 연계의 가능성이며, 거대서사가 기능했던 방식의 배타적이고 위계적인 수직적 연계의 불가능성이다. 즉 수직적 연계의 불가능성을 포함한, 수평적 연계의 가능성, 이른바 ‘연계의 (불)가능성’인 것이다. 이것은 밤하늘에 빛나는 외딴 별들 사이에 가상의 선을 이어 하나의 별자리 지도를 그려 보려는 시도와 같다. 이 지도는 여러 별들의 서로 다른 높낮이를 수직적 위계가 아니라 수평적 차이로 인식한다. 그리고 바깥의 다른 별들과의 교신을 통해 다른 형상의 선이 그어질 여지를 항상 남겨 놓는 한시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동시대 미술의 실천들을 편의상 6개의 범주로 구분한다. 이것이 편의상의 구분인 까닭은 동시대 미술의 실천 대부분이 실제로 하나의 범주에만 배타적으로 속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범주에 동시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 구분은 동시대 미술이라는 무정형의 대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임의로 조성한 6개의 입구 정도로 여겨져야 한다. 

  첫 번째 범주는 인간의 실존과 그 근본감정으로서의 불안이 엿보이는 작업들이다. 불안의 정서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 실존이 짊어진 보편적 정서라면, 동시대 미술이 실존의 불안을 다룰 때는 그 감정의 보편성뿐만 아니라 과연 동시대적인 불안의 특수성이 무엇인지도 드러내야 한다. 즉 보편 정서로서의 개인적 불안뿐만 아니라 특수 정서로서의 사회적 불안까지 담아내는 작업이 온전하게 동시대적인 미술에 속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개인적 고립과 사회적 고발을 아우르는 동시대적인 불안을 보여주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이 드러내는 동시대적 불안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실패의 까닭은 무엇인가?

  두 번째 범주는 여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여성을 위한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업이다. 1960년대 이후로 모더니즘의 남성적 시선에 대한 비판적 대응으로 탄생한 페미니즘 미술은 모더니즘이 거대서사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이후에도 여전히 중요한 이슈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상황과 관련하여 더욱 첨예하게 다가오는데, 왜냐하면 최근 한국 사회가 더더욱 노골적인 여성혐오의 징후들을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 여성의 욕망, 여성의 노동은 차별의 대상을 넘어서 혐오의 대상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 여성 예술가가 작업으로서 여성에 대해 발언할 때 갖춰야 할 에토스는 무엇인가? 지난 세기의 여성미술과 오늘날의 여성미술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즉 오늘날 여성미술의 동시대성은 무엇인가?

  세 번째 범주는 전통적인 매체나 기법들을 활용하는 동시대 미술의 실천들이다. 과거와 전통을 부정하고 새로운 미술의 기원을 수립하려는 모더니즘의 과열된 양상에 반발하면서 모더니즘 이전의 미술에 대한 향수를 적극적으로 내세웠던 반모더니즘적 실천은 모더니즘의 퇴조와 함께 그 동력을 상실했다. 오늘날, 모든 시대의 기법과 매체가 동등한 ‘시민권’을 획득한 예술의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전통적인 장치를 전유한다는 것은 반모더니즘적 실천과 어떻게 다른가? 그저 수많은 선택지 중에 우발적으로 선택된 경우의 수에 불과한 것일까? 어쩌면 적극적인 ‘시대착오’를 감행하는 동시대 예술가의 어떤 미적 자의식이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 자의식의 정체는 무엇인가?

  네 번째 범주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그 ‘이후(post)’를 사유하는 동시대 미술의 작업들이다. 모더니즘이라는 거대서사의 절대성, 그리고 그것을 부정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 상대성을 거친 예술가의 정체성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의심의 여지없이 동시대적인 것이다. 이때의 동시대성은 오로지 현재에만 시선을 고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근과거에 벌어진 절대성과 상대성의 각축전을 항상 염두에 둠으로써만 획득되는 태도이다. 모더니즘에 대한 망각과 향수를 모두 경계하면서 그와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의 허무주의에 굴복하지 않아야 하는 이중의 과제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들은 각자 어떠한 방식으로 이런 동시대성의 관문을 통과하고 있는가?

  다섯 번째 범주는 글로벌과 로컬의 긴장 관계를 동력으로 삼아 만들어지는 예술적 실천들이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예술적 가치를 추구한다던 모더니즘 미술도 결국 서구의 맥락에 국한된 지배적인 담론으로 밝혀지고, 후기식민주의의 영향 아래 1989년 파리에서 열린 전시 <지구의 마법사들> 이래로 제3세계의 개별적이고 지역적인 현대미술을 서구의 그것과 동등하게 위치시키는 전시들이 앞다투어 열렸다. 또한 1990년대 중반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자본의 신속하고 빈번한 이동 범위는 세계 전체로 확대되었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각각의 지역경제에 대한 관심도 높아만 갔다. 그 결과 오늘날 동시대 미술은 글로벌한 기준과 로컬한 특색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한다. 즉 이런 엎치락뒤치락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얻은 교훈은 글로벌과 로컬, 또는 보편성과 개별성은 동시대 미술이 양자택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사유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미술가들은 이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개의 가치를 어떻게 사유하고 가시화하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범주는 가속화된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술가의 작업이다. 고대 그리스어 ‘테크네(tekhne)’가 기술과 예술을 모두 아우르는 명사였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사실 기술과 예술은 애초부터 하나였고, 이 둘이 분리되기 시작한 건 근대 이후의 일이었다. 사진, 영화, 비디오 등 기술과학의 산물이 점차 예술매체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과정은 예술과 기술의 독특한 관계를 예증한다. 이렇듯 하나면서 둘이기도 한 예술과 기술의 모순적 관계는 오늘날 더욱 첨예한 문제로 드러난다. 현기증 날 정도로 빠르게 발달하는 테크놀로지는 더 이상 단순한 도구나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실존을 가능케 하는 환경이자 조건이 되었다. 즉 인터넷, GPS, 스마트폰 등 현대기술의 산물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기 위한 가능조건이 되었고, 생명공학과 환경공학의 급속한 발전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생존의 영역에까지 기술의 영향력이 미치게 만들었다. 이른바 뉴미디어아트, 넷아트, 바이오아트 등 다양한 신조어로 일컬어지는 동시대 미술은 이런 급변하는 테크놀로지 환경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오늘날 기술과 예술은 어떻게 같으며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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