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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신자이지만 영적 재능의 발달로 샤머니스트가 된 할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삶과 죽음의 문제에 천착해왔다.

내가 이끄는 아트 크리에이티브 그룹 ‘에피타프 Epitaph’의 주작업인 미디어 아트나 무대미술 작업 역시 이런 개념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대한민국에서 죽음은 대개 슬프고 부정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일부이고 그 자체로 재생과 정화의 의미를 지닌 ‘현상’이다. 때문에 삶을 잘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 현상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 작업 역시 죽음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됐다.

한 줌의 재가 되기 전에 사람은 무엇으로 존재 증명을 할까.

무엇으로 나를 남과 구분지을 수 있을까.

가장 효과적인 것이 ‘지문’이다.

지문은 아날로그나 디지털 모두에서 개인의 신분을 확인하는 효과적인 DNA 정보 매체다.

사람은 출생과 동시에 발도장을 찍으며 처음으로 존재 선언을 하고, 성인이 되었을 때 가상의 DB 시스템에 자신의 지문을 등록하며 한 개체로서 사회에 편입됐음을 확인한다.

이 점에서 지문은 그 사람 자체이자, 그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영원히 남는 생애사의 기록이다.

이 작품의 재료는 나의 지문이다.

 

인간 보편의 삶과 죽음을, 어느 누구도 아닌 익명의 지문으로 담아내려 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anonymous의 성격처럼 내 지문은 희미하거나 없다. 타인의 삶과 죽음을 소명처럼 치열하게 담아온 과거의 영광스러운 대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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